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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1948년 남북 제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
이름    관리자 등록일 2018.05.28 조회수 609

▣ 1948년 남북 제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

 

1948년 4월 남북 정치 지도자들이 통일정부 수립을 목표로 평양에서 정치회담을 개최하고, 4월30일 '전조선 정당사회단체 지도자협의회'의 명의 4개 조항의 공동성명을 발표한다.

 

1. 소련이 제의한 바와 같이 외국군대는 우리 강토로부터 즉시 동시에 철거하는 것이 조선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정당하고 유일한 방법이다.

2. 남북 조선 정당·사회단체 지도자들은 외군이 철거한 이후 내전이 발생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한다. 이들 大 정당·사회단체들 간에 성취된 약속은 우리 조국의 완전한 질서를 수립하는 튼튼한 담보이다.

3. 외국군대가 철거한 이후에 下記 제 정당들의 공동명의로 전조선정치회의를 소집하여 조선 인민의 각계 각층을 대표하는 민주주의임시정부가 즉시 수립될 것이며 국가의 일체 정권과 정치·경제·문화생활의 일체 책임을 가지게 될 것이다. 이 정부는 그 첫 과업으로서 일반적·직접적·평등적 비밀투표에 의하여 통일적 조선입법기관 선거를 실시할 것이며 선거된 입법기관은 조선헌법을 제정하며 통일적 민주정부를 수립할 것이다(全文임).

4. 남조선 단독선거는 절대로 우리 민족의 의사를 표현하지 못할 것이며, 이 성명서에 서명한 정당·사회단체들은 남조선 단독선거의 결과를 결코 승인하지 않을 것이며 지지하지 않을 것이다.

 

이 회담의 배경과 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45년 8월 해방 이후 한반도는 미국과 소련에 의해 분할 점령되었다. 동년 12월 연합국을 대표한 미국, 영국 그리고 소련의 외무상들이 모스크바에 모여 한반도의 통일정부 수립 문제를 논의하였다(모스크바 3상회의). 이 회의 결정에 따라 1946년 한반도에 미소공동위원회가 설치되었고, 미국과 소련의 대표들과 남북의 정치·사회단체 대표들은 이 위원회에서 통일정부 수립 방안을 논의하게 되었다. 그러나 미국과 소련은 참가단체의 자격 문제를 둘러싸고 끊임없이 대립하였고, 국내 단체들 간에도 정치적 이견을 좁히지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은 1947년 9월 한반도 문제의 유엔 상정을 주장하고, 소련은 미·소 양국 군대의 철수를 내세우면서 결국 2년간 논쟁을 벌이던 미소공동위원회는 결렬되었다.

 

미국, 소련 그리고 남·북, 좌·우 대립으로 인해 통일정부 수립의 꿈이 좌절되어 가던 이즈음, 중도파 정치인들을 중심으로 남북지도자 회담(남북협상)을 통한 문제 해결이 제기됐다. 1948년 1월 우파와 중도파의 대표적 정치인이었던 김구와 김규식이 ‘미·소 양군 철수, 남북요인회담과 총선을 통한 통일정부 수립’이라는 대원칙에 합의하면서 남북협상은 빠르게 진전됐고, 2월 16일에는 두 사람이 북한 측 정치지도자 김일성, 김두봉에게 서한을 발송했다. 즉각적인 답변을 하지 않던 북한 측은 3월 25일에 공식적인 답변을 내놓았는데, 남북 요인 회담이 아니라, 남북 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를 역제의했다. 북한 측에서는 정치지도자간의 회담이 아닌 범위가 훨씬 넓은 정치단체 대표자들의 연석회의를 주장하고 나온 것이다. 회담의 성격이 변화되었음에도 남한 측의 중도파, 민족주의 단체들은 적극 찬성의사를 밝혔고, 김구, 김규식이 이를 수락함으로써 역사적인 남북연석회의가 시작되었다.

 

1948년 4월 19일 평양 모란봉 극장에서 오전에는 남북연석회의 예비회담이, 오후에는 본회의가 개막되었다. 김구 일행을 기다리면서 20일을 휴회한 회의는 21일 속개하여 23일까지 개최되었다. 회의에는 남북의 56개 정당·사회단체(남측 41개, 북측 15개) 대표 695명이 참석하였다. 남한 측에서는 좌파 인사들 뿐 아니라, 조소앙을 비롯한 임시정부 관계자들과 홍명희 같은 민족주의자들도 대거 참석하였다. 그런데 19일 평양에 도착한 김구는 22일에서야 회의에 참석해 인사말만 하고 퇴장해 버렸고, 김규식은 아예 회의에 참석조차 하지 않았다. 이들은 남북요인회담의 개최를 계속 주장하였고, 마침내 이들 두 사람과 김일성, 김두봉이 참석한 ‘4김회담’이 개최되었다. 공식 일정에 없던 회의가 김구, 김규식의 요청에 의해 새로 만들어진 것이다. 4김회담은 남북지도자협의회 개최 전인 26일과 30일에 각각 진행되었다. 더불어 남북의 주요 단체 대표들 간에는 조선제정당·사회단체지도자협의회(남북지도자협의회)가 27일과 30일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되었다. 회담 기간 동안에는 이 외에도 다양한 행사와 회의, 요담 등이 진행되었다.

 

엄밀한 의미에서 남북연석회의는 19일부터 23일까지 진행된 본회의를 지칭한다고 할 수도 있지만 회의의 성격 등을 고려하여 통상적으로, 19일부터 30일 기간에 진행된 본회의, 4김회담, 남북지도자협의회 등을 통틀어 남북연석회의, 또는 남북협상이라 부른다.

 

4월 23일 폐막된 남북조선제정당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에서는 ‘조선 정치정세에 대한 결정서’와 격문 ‘전조선 동포에게 격함’, 그리고 ‘미소 양국정부에 보내는 전조선 정당사회단체 연석회의 요청서’가 채택되었다. 이들 문서는 남한 측의 단독선거와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한다는 내용과 그것을 위한 투쟁을 결의하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미·소 양국에는 군대의 동시 철수를 요구하였다.

 

그런데 정작 남북협상의 주요 결정은 4김회담과 남북지도자협의회를 통해 이루어졌다. 4김회담의 합의와 추인을 거쳐 남북지도자협의회에서 4월 30일 채택한 ‘남북조선 제정당·사회단체 공동성명서’에는 ① 외국 군대 즉시 동시 철거, ② 외국군 철수 후에도 내전이 발생하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 ③ 총선에 의한 통일정부 수립, ④ 단선단정 반대와 불인정이라는 4가지 원칙이 담겨져 있다. 이 성명서에 따라 이후 남북에서는 단선단정 반대 운동이 전개되었지만, 실질적인 변화를 이끌어 내지는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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